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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결심, 3번은 봐야 할 이유

#헤어질결심 을 개봉하자마자 조조로 봤는데 2번쯤 더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박찬욱 정말 대단한 감독이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10년 안에 개봉한 국내외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노빠꾸인 사람이라 절대 영화를 2번 이상 보지 않는데, 내가 2번 이상 본 영화가

 


1. 프랑소와 트뤼포의 줄앤짐(몽상가들 하고 비슷한데 여기 여주가 진짜 나랑 비슷해 내가 현대가 아니라 저 시대에 살았으면 저렇게 밖에 못 살았을 수도 있다. 지금이니까 저렇게 살면서 이렇게도 사는 거지)
2.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여기까지가 3대 최애, 그리고 동사서독, 아비정전 (여기까지 5대)
3. 그리고 현대의 감독 중에는 홍상수나 박찬욱 정도가 있다. 그런데 홍상수는 자기복제를 시전하는 타이밍 - 북촌방향 이후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다 - 부터는 안 보기 시작했고 흥미가 떨어졌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정도가 그래도 여러번 본 것 중엔 제일 잘 짜여 있으며 위트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신작은 항상 챙겨본다.


박찬욱은 좀 끔찍하니까 반복해서 볼 때는 끔찍한 장면들은 건너 뛰고 보게 된다. 특히 올드보이에서 혀 자르는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야.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사람을 질리게 하면서 코너로 밀어넣는 구석이 있는데 박쥐같은 경우에도 2시간 20분 정도에서 영화를 끝냈어야 하는데 1시간을 더 끌고가면서 멘탈을 탈탈 털어버린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엄청 미세하게 건드린다. 막상 장면 하나하나는 안 잔인한데 약간 감춤으로써 궁극의 공포를 각인하는, 매우 머리가 좋은 감독이다. 이영애 인생작인 금자씨도 좋아하지만 결말이 조금 밋밋했고 스토커 같은 경우에는 역시 한국어가 더 잘 맞겠다 싶으면서 박찬욱 감독 특유의 정서가 잘 살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해야 하나? 박찬욱 영화 중에서는 스토커가 여러모로 후달리는 게 서양 보단 동양 정서를 훨씬 잘 살려내는 감독인 것이다.

 


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내가 딱 미쟝센집착광공이다. 카메라가 잡는 앵글과 색감의 조화, 완벽한 구성과 연출이 더해진 이루 말 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약간의 처연함과 비장미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현대적인 스타일 보다는 클래식과 고전미를 숭배하며 엔딩은 해피냐 언해피냐 보다는 '얼마나 부조리한가'에 환장하는 편이다.

 

주인공이 자살하는 엔딩을 정말로 좋아한다. 영화가 끝난 세계에 주인공이 남아서 구질구질한 삶을 사는 것 보다는 영화가 끝나며 주인공의 세계도 함께 끝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가장 부조리한 엔딩이 내게는 가장 합리적이다.

 

최근에 리뷰유튜버들 덕분에 영화 본편을 잘 안 보게 됐다. 결말포함 리뷰는 나같은 타임세이버에겐 최고의 선물이다. 1시간 동안 영화 5편을 볼 수 있다. 리뷰 보고 전편을 보게 된 건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 밖엔 없다. 그러다 개봉하자마자 조조로 보고 출근한 게 '헤어질 결심'이다.

 

 


미쟝센집착광공인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몽땅 들어있는 영화였는데

 

1. 언어 유희 - 나는 단어를 선택할 때 음율에 집착하는 편인데 PC통신 시절부터 최초의 인터넷이 생길 때 사용하던 ID가 flower였거든. 꽃이 좋아서도 있겠지만 'fㅡL rㅏ워어ㄹ'하는 풍성하고 여유로운 발음을 따라 읽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감독이 탕웨이를 캐스팅 해 한국어에 어눌해서 마침내, 같은 단어들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하고 중요한 말들을 중국어로 처리한 후 시리의 목소리로 읽게 하는 건, 스마트폰 시대 최고 로맨틱 장치가 아닐까?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라는 에로틱하면서 그로테스크한 치명적인 대사를 바로 알려주는 대신 시간차를 두고 기계음으로 읽히다니 이보다 더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까?


2. 톤 다운 된 컬러와 앤틱한 장치들로 점철된 탁월한 미쟝센 - 단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소품들, 아이스크림을 퍼 먹는 숟가락까지도 전부 계획된 아이템이라고 밖에는. 그리고 같은 장면을 다른 앵글에서 잡을 때의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는 반전들은 진심으로 소름끼친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상상인지, 현실인지 모르게 두 사람의 샷을 구성한 장면들은 한창 잘 나갈 때 왕가위 감독의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돌아와 줘 왕가위). 아가씨,는 좀 투머치인 장면들이 많았는데 헤어질 결심,에서는 확실히 힘이 많이 빠지고 그래서 더 여유와 여백이 적절했다.


3. (스포주의/결말쬐끔있음) 어떻게 이 플롯에 이 보다 더 좋은 결말을 만들어 낼 수 있겠음? 박찬욱은 사력을 다해, 진짜, 천재야! 마지막에 떨어지는 바닷물로 그간 목소리를 녹음했을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적시는 장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3개를 꼽으라면 1번이 될 것 같다.

 

(TMI)나머지 두개는, 박해일이 볶음밥 할 때 옆에서 담배피는 탕웨이(이거 약간 아비정전이랑 타락천사 섞어놓은 삘), 소파에 쪼그리고 앉은 탕웨이가 빨간립스틱에 빨간원피스 입고 '사랑한다' 계속 돌려듣는 정말 찰나에 지나간 장면. 가장 비참한 순간에 인간을 지탱해 주는 단 한 순간의 기억, 혹은 사랑같은 거랄까. 네, 제가 남들하고 빠지는 갬성 포인트가 좀 다릅니다... 쓰고 보니 온통 탕웨이 뿐이네. 역시 궁극의 아름다움은 여주 뿐이구나. 탕웨이의 성숙한 사랑에 비해 박해일은 역시 애 같았어 -_-;;;

 


아무튼 이 영화를 3번 이상 안 볼 이유를 찾기가 힘들다. 박찬욱의 다른 영화들처럼 잔인한 장면도 없고 친절하지만 결코 구질구질하지 않으며 의도된 촌스러움이 오히려 세련되게 느껴지는 매우 희한한 문법을 차용한 영화다. 유튜브때문에 1시간 넘는 영화 본편을 끊김없이 보는 집중력이 저하된 나같은 인간에게 조차 단 한 순간도 몰입을 방해할 요소가 없다. 나같은 미쟝센 빠돌이들은 울면서 세번 볼 수 밖에 없는 영화기 때문에 나랑 취향이 조금이라도 같다고 생각하면 빨리 극장으로 달려가서 스마트폰 말고 대형 스크린에서 보길 바란다.

 


첫번째는 아침에 봤으니까 두번째는 한밤중에 보고 세번째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다면 줄거리랑 대사 다 꿴 상태에서 술 한잔 하면서 봐야 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