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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별헤는 방

Black Swan - 정신분석학적 의미(스포일러 有)


(결말 나오니까 영화 안 본 분들은 클릭하지 마세요!!!)



이 영화는 ''에 대한 영화다.
모든 등장인물과 상징은 결국 의식과 무의식을 제대로 포용한 나의 완성을 향상 몸부림이다. 당신이 의학, 문학, 심리학 따위를 전공하지 않았을지라도 프로이트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학문이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해 철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기를 원했으나 철학과 정신분석은 따로 놓고 볼 수 없다. 삶과 나에 대한 깊은 고뇌없이 어찌 자기 무의식의 검은 그림자를 직면하리.

여기서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 삶의 본능인 에로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 원초아(본능, id)-자아(ego)-초자아(superego)에 대한 간단한 고찰이 필요할 듯 하다. 프로이트 생전 수십권의 저서로 남긴 방대한 양을 단 몇줄에 정리하기 힘들겠지만 부족하다면 구글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의 개념 정도는 짚고 넘어가자. 프로이트의 이론은 워낙 심층적이고 방대하며 생전에도 몇번을 수정하고 바꾸었기 때문에 수박겉핥기 식으로 알다가는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 대해서만 깨우치면 상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 아주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초기의 프로이트는 리비도, 즉 성에너지라 불리는 삶의 본능에 관한 에너지만을 이야기 했으나 그가 말년에 암으로 죽을 고생을 하면서 성욕동 외에 죽음의 본능, 공격 욕동에 대한 이론을 추가하게 된다. 이러한 본능들이 주로 원초아라 불리는 id의 구성요소로 이것은 무의식적 욕구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자아란 워낙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으나 이 자아(ego)라는 개념은 프로이트를 떠나 새로운 학파를 설립한 Jung의 self(자기, 자아)에 비견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융이나 프로이트나 주장한 것은 자아의 통합에 관한 이야기다. 초자아(superego)는 말그대로 자아(ego)를 초월하는 존재로 완벽과 이상을 추구하는 판사이며 도덕적 성격의 부분이다. 에고는 이드와 수퍼에고 사이의 교통경찰 같은 역할로 둘 사이의 완급조절을 하며 한 개인이 성숙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매개의 역할을 한다. 즉, 인간은 성/공격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쾌락주의적인 이드의 욕구와 완고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도덕적인 초자아의 통제를 에고가 적절히 절제하고 분출하게 하면서 비로소 성숙해진다.




블랙스완의 히로인인 니나 세이어 역의 나탈리 포트만은 바로 '나' ,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 갈등하는 나, 에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다. 사실 경계라는 말도 어울리진 않는데 어차피 한 개인은 의식과 무의식, 이드-자아-초자아로 이어지는 세가지 성격의 구성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극 중에서 상징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니나는 에고 뿐 아니라 하나의 개인, 개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 사이에서 적절히 완급 조절을 해야할 우리와 똑같은 인간.

릴리 역의 밀라 쿠니스는 자연 그대로의 이드, 그리고 엄마 역의 바바라 허쉬는 도덕관념인 수퍼에고다. 외부 환경적 불안 요소는 베스 역의 위노나 라이더. 단장은 그녀가 이드와 초자아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스승과도 같은 역할인데 극적 전개상 다소 호색적이고 냉혹하게 보여졌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온 부분으로만 미루어 보건대 그는 분명 니나에게 극중 역할인 단장과도 일치하는 스승의 역할이며 동시에 리비도의 대상이다. 단장 역의 뱅상 카셀이 '분출하라'는 대사를 많이 하는데 이것이 영화에 쓰인 원어인 영어로는 Let it go였다. 즉, 두려워 말고 그대로 발산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것,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이니.

이에 대립되는 엄마의 대사 '나의 착한 딸'이라고 하는 My sweet girl을 보면 말 그대로 달콤한 딸, 착하고 말잘듣는 아이로 남으라는 것인데 성인이 된 딸에게 한두번의 애정 표현도 아닌 입에 붙은 저 호칭이 니나로서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있으며 니나를 흔들수 있는 위치에 있고 사랑에서 자유롭다. 히스테리(신경증)의 기원이 여성에게서 파생된 걸로 미루어 보아 절대 이 역할에는 여배우를 배역으로 쓸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으며 나름의 해석을 하고 대학을 가서 심리학이라는 학문 속의 정신분석을 접하면서 품었던 의문 중에 하나는 '도대체 왜 도덕관념인 초자아가 발달하는데 인간이 괴로워 지는가?'였다. 도덕이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아닌가? 공자, 맹자를 비롯한 옛성현들이 그렇게나 도덕적으로 살자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일탈이라고는 몰랐던 내게 부모와 선생님의 금기는 곧 나의 금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리비도의 개념과 초자아, 융의 정신분석까지 다양한 노력과 경험, 연륜(?)으로 깨달으며 과도한 초자아의 발달이 본질적인 생의 근원을 추구해 나아가는데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를 깊이 깨달았다. 욕망과 욕구, 충동 역시 인간 본능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들이 얼마나 부당한 방법으로 이것들을 절제가 아닌 억압으로 통제하며 사는지 절실히 느꼈으며 지금도 여전히 처리되지 못한 억눌린 욕망의 군상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있다.

또한 그 초자아가 나의 의지, 절제로서가 아닌 타인(남근기의 동성 부모, 혹은 유년기의 거절 불안 등) 혹은 외부환경(종교, 타인의 눈치, 시선 등)에 의해 억지 형성 되었을 때, 그것은 개인의 삶을 '불안(정신분석학적 용어로서의 불안)'하게 만드는 매우 치명적 요소가 된다. 이를 테면 과도한 이드로 인한 사회부적응이나 비행은 타인의 눈에도 분명 심각해 보일 수 있는 부분(정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 위해 풀어 씀)이고 타인을 해할 수 있으므로 처벌, 혹은 교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수퍼이고의 발달로 인한 강박이나 불안은 고스란히 본인의 내면이 떠 안아야 하므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심각한 경우 성격장애와 정신분열로까지 나타날 수 있다. 더욱 치명적인 경우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자살을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에 한해 필요할 수 있는 부분이라 여기지만 그것이 타인을 향한 공격 본능,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신경증, 히스테리. 그것 또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이드-자아-초자아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융의 분석심리학에서의 자기 이론이라면 통합이라는 용어를 쓰겠다) 어느 한쪽이 비대해질 경우 임박한 위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불안에는 현실적 불안, 신경증적 불안, 도덕적 불안이 있으나 현실적 불안은 외부세계에서 오는 위험으로 인한 두려움이며 실제의 정도에 비례하는 미결정이나 사고 상황의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불안이므로 일단 제외하자.

신경증적 불안은 본능이 통제되지 않아 벌을 받을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며 도덕적 불안은 자신의 양심으로 부터 오는 불안으로 도덕 규칙이나 부모로부터의 내사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경향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사실 이 두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양심과 도덕으로 과도하게 본능을 억제하려 들면 본능은 더 분출되려 하고 이 분출된 욕망은 신경증을 유발한다. 분출된 욕망이 신경증을 일으키면 다시 판사와도 같은 초자아는 이것을 과하게 억제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도덕적 불안을 야기한다. 자아가 비대해진 이 두 부분을 컨트롤 할 수 없게 되면 히스테리가 유발된다. 이러한 위험 신호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프로이트는 억압, 거부, 반동형성, 투사, 치환, 합리화, 승화, 퇴행, 내사, 동일시, 보상 등을 들고 있다.



아, 이러다간 정신분석 개론서가 될 것 같아 대충하기로 하자.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니나에게 통합해야 할 과제로 주어지는 것은 백조(초자아)와 흑조(이드)이다. 초자아(엄마)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된 완전무결의 삶을 살아온, 완벽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니나에게 백조란 너무 쉬운 과제였으나 욕망을 분출해야 할 리비도 자체인 흑조는 초자아의 무거운 굴레에 짓눌리는 그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또한 그녀에게 그러한 억압적 도덕관념을 씌웠을 것이 분명한 전직 삼류 발레리나였던 그녀의 엄마 역시 그녀의 못다 이룬 욕망을 딸에게 고스란히 투사하여 무거운 굴레에 한 꺼풀을 더한다.
 
이때 '자위를 하라(Touch yourself)'는 단장의 과제는 욕망 분출의 가장 중요 과제이다. 성적인 억압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자위는 성상담소의 단골 문의 사항이다. 특히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억압의 수위는 더욱 강렬하여 성기에 대한 죄악시로 까지 발전하지 않았는가. 이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자신의 성기를 보려다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장면에서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터부에 대한 도전은 결국 본인을 다치게 한다 - 이것이 여성의 욕망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다. 단장이 노골적으로 숫처녀(Virgin)냐고 물어보는 장면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삽입되지 않았다. 자위를 해보지 못한 그녀에게 그 전의 섹스 경험은 당연히 자의적인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한 욕망이었을 테고 단장은 두려워하는 니나에게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욕망(이드)을 스스로 분출할 수 있도록, 흑조의 관능을 표현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직접 만져보라고 한 것.

앞서 설명했듯이 초자아의 외부 인물이 엄마라면 이드의 상징은 릴리. 등에 있는 검은 날개 문신에서부터 그녀는 니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이드이다. 거칠지만 자유스러운 그녀의 춤에 대한 단장의 설명을 비롯한 단장의 대사들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해설과도 같다. 그의 대사들만 잘 이해해도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결말은 초반부에 이미 예견된다. 그녀는 순수하다. 취하고 싶으면 마시고 자고 싶으면 자고 마약도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여성, 그 자체의 매력으로 남자들을 유혹한다. 미안하면 니나의 집까지 알아내어 찾아와서 인사하는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욕망이다. 니나는 그 욕망이 자신을 잠식할까봐 항상 두려워하고 증폭된 반응을 보인다. 니나는 깨지기 쉬운(fragile) 연약한 자아다. 이 장르가 스릴러이니 만큼, 그리고 영화 곳곳에 숨은 복선들로 미루어 보아 이 연약한 자아는 절대 강해지지 않고 끝날 것이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거울 장면과 그것이 항상 분열되고 깨어지는 것, 거울 앞에서 항상 니나가 불안해 하고 자학을 하는 장면들이 연달아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절대 이 영화는 니나의 죽음 외에는 그 어떤 결말로도 향할 수 없다. 통합되지 못한 자아는 생의 근원에 다다를 수 없다. 그녀는 결국 죽음으로 완벽(perfect)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을 뚫는 벌레에 관한 꿈은 자기 비하와 심각한 자책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꿈이다. 영화에서 니나가 릴리의 거침없는 표현에 좌절을 겪으면서 거울 앞에서서 자기 등의 살갗을 뚫는 검은 벌레는 꺼내는 장면은 바로 이를 표현한다. 영화를 본 후 사람들은 환상과 현실이 섞여 어렵다고 하지만 정신분석적 상징체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이 영화가 일관적인 흐름과 장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상은 결국 정신분석적 상징들과 모조리 연관되어 있다. 엑시타시로 추정되는 약을 먹은 후 니나는 분명 릴리와 성적인 접촉을 한 것으로 기억하나 릴리는 그녀의 집에도 가지 않은 것. 이 장면에서 맘껏 분출되고 쾌락을 누리던 이드(릴리)는 마지막 베게로 내리누르는 초자아(엄마)로 변하면서 결국 막을 내린다. 니나 내면의 갈등과 그 둘 사이의 완급 조절에 실패하고 엄청난 신경증의 불안 속에 그날 하루를 보내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동성애 코드로 표현된 이드의 분출에 실패하고 공연 전날엔 결국 엄마까지 밀어붙여 다치게 한 다음에도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무대에 선다. 그러나 흑조 연기를 앞에둔 그녀의 불안은 극도에 달한다. 결국 강렬한 이드(릴리)가 에고(자신)를 침해한다 생각한 그녀는 그것을 파괴해 버린다. 그것은 아마 본능이었을 것이다. 이드에 잠식 당하지 않으려는 본능. 그러나 본능을 통제해 줄 도덕은 이미 자기 손으로 다치게 해 버렸고 관능적으로 연기해야 할 흑조 연기 앞에서 그녀의 불안은 결국 자아를 잠식해 버린다. 스스로(자아, 니나 본인)는 이드를 죽음으로 응징하고 처리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자신의 본능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한 개인은 죽음으로만 '나'의 만족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다. 

베스를 찔러 죽이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베스가 스스로 얼굴을 찌르는 것 같지만 찌르기의 막바지에서 찌르는 사람은 니나로 바뀌어 있고 엘리베이터를 탄 그녀의 손에는 피범벅된 칼이 들려 있다. 이 장면에서 실제로 니나가 죽였는가, 환상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즉, 베스가 실제로 죽었는가 죽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외부의 불안 요소를 니나가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찔렀다는 것(혹은 죽이거나 죽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 즉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인 혹은 살해, 피로 제거했다는 것), 외부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나서도 자기 안의 무의식, 이드와 초자아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진정한 자기에게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어려움과 사건, 사고들을 겪게 되는데 이때 외부의 환경은 지나간 과거로 결코 바뀌지 않는다. 바꿀 수도 없고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불안과 불행의 시초다. 하지만 제대로 형성된 높고 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지 도피하거나 외면하거나 파괴하려 들지 않는다. 이러한 자극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한 자아를 가지는 것, 결국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하자면 말하는 전이, 역전이, 저항, 자아방어기제 등을 이해하고 내 안의 어두운 기억과 무의식을 스스로가 감싸안을 수 있을 때에만이 건강한 자아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거울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온 이유는 정신분석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상담에서 거울 개념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거울은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며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도구로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부모, 나와 자아를 설명하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쓰인다. 특히 집단 상담이나 심리 상담에서 갈등 상황을 설명할 때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거울이란 어떤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은 좌우가 바뀐대다 뒷모습은 볼 수 없다. 즉, 의식의 나는 보이지만 무의식의 숨은 나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별 후의 뒷모습은 어떤가? 아무리 당당해지려해도 쓸쓸한 그 모습은 지울 수가 없더라. 그리하여 이별 후엔 먼저 돌아서면 안 된다고 했던가. 막상 또 뒤를 보려고 거울 두개의 사이에 서면 그건 또 어떤가? 수많은 나의 상이 생기고 어지럽게 분열되어 버린다. 블랙스완에서도 두 겹의 거울 사이, 그리고 하나의 거울과 그 주위를 둘러싼 작은 거울 장면이 나오는데 거울을 영화 곳곳에 배치한 것 역시 이 영화는 의식과 무의식, 자아의 통합에 관한 끝없는 상징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울 장면은 말한다.

'너를 봐. 네 안의 너를 직면해. 피하지 말고  부딪혀.'



손톱을 엄마가 가위로 깍는 장면 역시 초자아의 과도한 이드 응징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초자아의 기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녀의 신경증은 더욱 유발되고 그것은 자학적인 자기 파괴로 향할 수 밖에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원작에서도 안무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블랙 스완에서의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자아통합에 관한 이야기다. 원전 역시도 저주에 걸린 백조와 흑조, 왕자를 두고 무의식, 의식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안다. 자세히 읽어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왕자로 대변되는 인물이 단장이라는 좀 더 쉬운 캐릭터로 대치되었다 할 수 있다. 단장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다.



내가 영화를 보고 바로 트위터에 올린 글 중 하나가 엄마 처리에 대한 아쉬움인데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단순히 넘어지는 간단한 부상(?)만으로 끝난 것은 니나의 죽음에 대한 더욱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초자아와 이드의 부조화로 인한 자아의 파괴장면을 이를 유발시킨 부모에게 보임으로써 '자살=타인 공격'의 공식 역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드로 상징되는 릴리를 죽였다고 생각했으나(그것도 깨진 거울로) 그것은 상상에 불과했던 것, 사실 그것은 자기를 찌른 것이었다는 점은 결국 이드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적절히 직면하지 못하면 그것이 '나'의 전체를 잠식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의식 vs 무의식으로 설명할 때 흔히 무의식의 부분을 '빙산의 일각'으로 표현하는데 그만큼 숨어있고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실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 


예술의 측면에서도 한 번 조망해 보자. 



 
"프로이트에 의하면 예술가들은 기질적으로 강한 본능 욕동을 지니며 이것을 자유롭게 분출하고픈 욕구가 유난히 큰 사람들이다. 그러나 욕구가 큰 만큼 거세불안 또한 크기 때문에, 결코 그 욕구를 현실 대상을 향해 자유롭게 분출하지 못한 채 내향화한다. 그래서 이들은 신경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억압된 본능 욕동을 예술적 상징으로 변형시켜 분출하려고 평생동안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 이창재 저, 프로이트와의 대화 中


얼마 전에 올린 글에 삽입한 인용구이다. 블랙스완에서 발레리나인 니나의 경우에도 이러한 예술가의 면모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완벽한 테크닉을 가지고 서도 자신의 리비도를 적절히 분출해내지 못함으로써 억압되고 이것을 예술적 상징으로 분출해야 하는데 어쩌면 그녀의 경우 분출해 내어야 한다는 것 자체부터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억압당함으로써 테크닉을 넘어선 창작과 창조의 경지에 까지 다다르지 못한 흑조로서의 갈등을 읽어낼 수 있다.



정신분석 중 말러의 대상관계이론에서 생후 4-5개월 경 개인화 과정(중요 타인-대개 어머니-과의 공생관계를 떠나며 독립과 의존이 성립하는 시기) 단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경계선 성격 혹은 자기애성 성격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 니나의 경우 경계선 성격장애의 병리적 현상들이 곳곳에 엿보인다. 경계선 성격의 원인은 분리 과정에서 자신의 개별화에 대해 어머니(혹은 어머니의 상)가 이런 개별화를 견뎌 내지 못함으로써 위기가 발생한다. 자기애 성격의 경우 분화 과정에서 거부당한 경우 발생한다.

니나와 엄마의 관계에서 어머니는 지나치게 딸에게 집착하고 분명 이 개인화 과정에서 니나는 분리되려는 자기를 어머니가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깨달았을 것이다. 이러한 위기감은 불안정, 안절부절, 충동, 자기 파괴적 행동, 심한 기분 변동 등으로 나타나며 환멸감과 병적 쾌감의 기간도 가진다. 부모들이 아가들이랑 같은 방을 써서 그런가?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여성들 중 심각하지는 않지만 자기애성 성격의 경향들을 가진 사람들이 다소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자기애성 성격의 특성은 애정이 천박하고 타인을 이용하거나 기생하려는 특성이 있으며 공허감과 무력감을 만성적으로 가진다. 외로움을 주체하기 힘들어하고 애정(연인)의존적이며 연인에게 뭔가 큰 선물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여자는 결국 낮은 자존감과 잘못 형성된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정한 자기애를 가지게 되면 그 깊이만큼 이해심과 포용력이 넓어지며 타자의 고통에 눈뜨게 된다(SJ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