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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별헤는 방

<피에타> 수상을 축하하기에 앞서



아침에 눈 뜨고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 소식. 꽤나 괴취미의 예술가들이 득시글 거리는 내 주변에도 박찬욱이나 이창동 정도의 팬들은 많아도 김기덕은 그렇지 않았다. 나조차도 그의 영화는 몹시 불편하다. 꾹 참고 보지만 역시나 보고 나면 며칠은 속이 메슥거린다. 특히 해안선을 떠 올리면 본지 십여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혈관 속으로 벌레가 스멀거리며 기어다니는 기분이랄까?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 보면 마치 피에타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그의 내면이 순차적으로 교차 상영되는 듯 하다. 인간의 추악함과 그 극단의 반대편에서 한템포 물러선 느낌의 영화를 번갈아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해안선>, 다음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조직과 위계질서 안에 놓인 인간의 복종과 잔혹함을 그려내더니, 이에 사과하듯 자연과 고독한 수도승의 풍경을 그려낸 작품을 연출한다. <사마리아>에서는 당시 한창 이슈가 되었던 원조교제의 밑바닥을 잔학하게 드러내고 <빈집>으로 다소 기이하지만 어쨌거나 사랑, 그 이면을 그려내며 화해한다.


특히 초기작인 <섬>이나 <나쁜남자> 같은 에로(?)잔혹극들에서 보여준 비현실성과 밑바닥까지 떨어진 끔찍한 대사들이 중기작들에 와서는 다소 누그러진다. 아주 오래 전, 리뷰한 바 있는 <비몽>에서는 확실히 내적 극단의 고독에서 한발짝 물러나 세상과 소통하려는 느낌을 한껏 드러내었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현실적인 전작들에 비해 다소 몽환적이고 직관적인 느낌의 <비몽>은 감독이 김기덕인가를 스스로에게 몇 번 되물을 정도로 아주 동떨어졌었다고 느껴진다. 평론가들에게 다소 낮은 점수를 받은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사랑이야기다. (필자 역시 괴취향이다. 인정!)


<비몽>에 도달하기 전, <시간>을 비롯해 그가 직접 연출하진 않았더라도 제작이나 원작에 이름을 올려 놓은 <아름답다> 같은 영화들은 오히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 듯 내면에 견고히 자리잡은 극단적 고독의 단단한 껍질을 깨려는 그의 시도가 역력히 느껴지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중졸로 영화바닥에 뛰어들어 홀홀단신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 깨달의 그의 실험적 시도들은 어쩌면 멀쩡히 4년제를 졸업한 다른 영화인들이 죽었다 깨나도 얻을 수 없는 몸에 배인 사상적 외로움, 그 자체일 것이다.


이번 <피에타> 역시, 중학교를 뛰쳐나와 청계천의 작은 공장에서 품팔이 하며 켜켜이 쌓인 그의 청년 시절 애환이 결정적 모티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경제적 자본주의와 철학적 인간 이기심의 바닥을 그리는데 이만한 직접 경험이 어디 있었을텐가? '인간의 추악함을 아는 사람만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필자의 주장과도 맞먹는 그의 행보다. 인간의 아름다움만을 보는 사람은 진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만 수용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현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현실들을 우리는 언제나 외면한다. 옆동네 아현동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 앉아 울고 있어도, 것도 모자라 20억 소송으로 마지막 남은 밥벌이 까지 잃어도 내가 방바닥에 배 깔고 드러누워 티비보고 있으면 아쉬울 게 없는 게 당신네 인생 아니던가? 대기업 극장들이 저자본 독립영화들을 상영하지 않고 수익나는 블럭버스터급만 상영할 때도 주말이면 언제나 매진되기 바쁘던 게 우리나라 영화 시장 아닌가?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이 타임라인을 도배하기 시작하자 거의 동시에 대기업 상영관에 대한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크린 쿼터제를 비롯해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일등하고 상 받고 외국에서 알아줘야만 눈 돌리는 시민정신 없는 시민들의 행태에도 슬슬 지쳐갈 때 아닌가? 의식이라는 건 누군가 심어주는 게 아니다. 언론들이 이슈를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역시나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문제다. 이토록 여론몰이 하기 쉬운 국민들이 또 있던가?


비주류로 평단과 관객의 질타를 받던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수상 소식이 감격스러운 만큼 주목조차 받지 못한 채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 고개숙인 또 다른 비주류에 조용히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