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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별헤는 방

[감상] '잔향' 後愛

잔향 (bs 김창현 gt 방혁/오정수 dr 김책) 2012/02/27 20시 올림푸스홀



아마 내가 클럽과 공연장, 페스티벌 등 수백번의 재즈 연주를 접하고서도 자발적 리뷰를 쓰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평론을 하는 것에 대해 근원적 거부감이 있다. 단순한 감상이라손 치더라도 모든 공연을 다 좋거나 싫다의 취향적 문제로 치부하기도 힘들지 않은가? 사진을 순간의 느낌, 현재의 찰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내게도 음악은 그냥 일상이다. 바람소리, 물소리는 산에 가면 들리는 음악이고 창문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찻잔에 커피 따르는 소리들 조차 내겐 음악이다. 글 또한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이토록 길게 늘여쓰는 블로그까지도 그 순간의 느낌, 찰나의 번뜩임을 언어로 설명하기 위함 아닌가?
 

공연 끝에 김지석씨가 애호가라 소개할 때 진심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입을 막아버렸지만 어째 그가 막는다고 막힐 그런 캐릭터인가? 어쨌거나 나는 마니아적으로 음악을 찾아서 듣거나 장르별 히스토리를 공부하거나 잡지를 보며 최신 정보를 습득하는 종류의 사람들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글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므로 내 마음을 후벼파지 않는 음악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삶의 방식의 차이다. 경제적 돈벌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진정 원하는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아주 관대하다. 돈 없이는 쌀 한톨 살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을 하며 돈을 버는 일이란 나같은 천하의 한량에겐 더없이 고역이다. 봉건 사회의 양반으로 나고 자라 시나 읊고 거문고나 뜯으며 태평하게 먹고 살지 못할 바에야 구분된 몇 개의 일상을 산다는 것이 어째서 나쁜가? 우리는 두배로 열심히 산다.

 


우디 앨런이 올해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 상을 주고받는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죠. 나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따를 수가 없어요. 그들이 '당신 작품은 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라고 할 때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상을 받을 가치가 없다'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죠.

(* 우디 앨런의 아카데미에 얽힌 일화는 다음의 블로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http://deulpul.net/3811602)

 

우디 앨런의 독고다이야 말로 그의 영화에 독창성을 불어넣는다. 트위터의 진중권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평론이란 참으로 고단한 일이며 글 자체가 가장 의식화된 예술(과연 예술의 분류에 넣기에도 애매하다. 시나 되면 모를까?)인데 거기다가 한 단계를 더 거쳐 인간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예술에 이러쿵 저러쿵 떠든다는 것 자체가 타인의 주관성을 철저히 인정하는 나와는 맞지 않다

 

일단 잔향의 공연관람은 신체화로 나타났기 때문에 나같은 사고형 인간에게는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먼저, 항상 먹던 시간에 규칙적으로 밥을 먹고서도 위가 쓰려서 집에 오는 내내 속이 불편했다. 그리고 공연 도중 온 몸이 가렵고 뒤틀려서 괴로웠다. 그냥 멍석깔고 누워서 보는 게 딱 좋은 공연이었달까? 세번째로는 자위가 절실히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연주자의 처절함에 극도의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위란 말이 성적인 마스터베이션이건 심리정신적 위안이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둘 다 이기도 하다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민망하다면 이 자리를 빌어 한 단락을 더 덧붙여보고자 한다. 내가 십여 년 전, 대학시절에 성폭력 위기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어차피 심각한 사고들이야 경찰로 바로 넘어가고 대체로 센터로 오는 온라인 및 전화상담은 문의에 가까웠다. 그 중 가장 많은 주제 중 하나가 '자위는 나쁜가요? 자위하면 위험한가요?'. 수십번 이상 답해 주다 보니 여기 글 올리는 놈들은 어쩌면 변태성욕자들이 아닌가란 망상마저 생겼다. 게다가 이러한 질문에는 정형화된 답변마저 있었으니 얼마나 우리나라가 성기 터부의 억압적 문화에서 살고 있나 하는 고찰의 계기가 되었다.


마침 오늘 아침에는 친구가 출근길부터 성상담을 하는데 알던 남자와 충동적으로 섹스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주 하는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서 날짜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 했어. 임신이 걱정 돼'라는 말에 울컥했다. 이는 여성들 스스로를 성적 도구로 옭아매는 발언이며 동시에 성교에 대해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일이다. 본인이 그 순간 즐거웠고 행복했으면 됐지, 헤프다는 것은 타인의 의지에  휘둘리는 일이다. 아마 그 친구의 불행은 섹스 자체가 아닌 '손만 잡고 잘게'의 거짓에 속아 넘어간 스스로에 대한 자책일 것이다. 자주 하건 하지 않건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사회적 약자로서 사회의 의무를 요구하기에 앞서 자기 몸은 스스로가 챙기고 보호해야 하며 이것은 곧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자주'라는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 역시 예술하는 친구라 상처받을 까봐 돌려 말했으나 이 땅의 비주체적 여성들에게 나는 오늘도 통탄해 마지 않는 바이다. 물론 비주체적이라는 용어가 의존적이란 말과 1:1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 혹여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친구 뿐 아니라 내 자신도 혹독하게 비판하는 편이니 부디 양해를 부탁드린다)

 

공연을 보러간 이유는 단순하다. 일단 기타치는 방혁씨가 소식을 알려주며  청하기에 어떤 컨셉이냐 물었더니 오리지날도 아니오, 퓨전도 프로그레시브도 아니오, 심지어 재즈도 아니란다. 아무리 내가 자주 쓰는 말이지만 '우주의 기운'이라니. 엄청 아방가르드한가 보다 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대체 우주의 기운 같은 음악이란 어떤 건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주의 기운이야 말로 내가 대화에서건 글에서건 학문적 설명에서건 자주 쓰는 말 아닌가. 게다가 키스 쟈렛처럼 바로 레이블로 출원한다니 호기심이 일었다. 호기심이야 말로 나의 정체성 중 핵심이 아니던가.

 

'형식의 파괴' '가치의 전복'이란 말을 쓰지 않고 이 공연에 대해 어찌 표현 할 수 있겠는가? 리더 김창현의 밴드 소개 조차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된 음악만을 연주하고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간 구성은 아주 훌륭했다. 이에 대비하여 입장시 컬러풀하고 두꺼운 재질의 팜플렛 대신 심플한 흑백의 A4용지에 연주자와 곡목을 상세히 소개한 안내문을 나눠 주었던가 보다.

 

아마 랜덤으로 길가는 사람들을 관객으로 초청하여 공연을 들려 주었다면 음악보다는 어떤 메시지 같은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너무 어려운 메시지 인가? 그렇다면 소리 정도로 해 둘까? 대개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이 사람의 감정, 감각, 감동을 이끌어낸 다면 이 음악은 오히려 생각을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이런 식으로 단정 짓는 것도 이 공연에 대한 예의는 아닌 듯 하다. 청자, 즉 해석자의 다양한 반응을 예상할 수 있으므로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블로그에 취미로 쓰는 내 멋대로 일기 정도로 해 두자. 돈받고 잡지에 기고하는 것도 아니니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글을 우연이든 필연이든 접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곡목을 살펴 보자.

 

2012

너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하여

무제77

무제99

슬픈 중년을 위한 발라드

수선화

 

모든 음악, 특히 재즈야말로 만든이, 인간 그 자체를 철저히 반영하고 있지만 잔향은 특히 더 그러했다. 김창현 개인의 중년기가 절정에 달한 시기일 것이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 중년기 말이다. 융이 말하는 중년기란 그의 분석심리를 중년기 심리학이라 칭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중요하고, 또 방대한 개념이나 간략히 훑어 볼 수 있는 페이지를 첨부한다http://blog.daum.net/eudaimonia01/6079031

 

③ 중년기 : 정신적 변화의 시기, 외부세계를 정복하는데 쏟았던 에너지를 자기내부에 초점 맞추도록 자극 받으며, 자신의 잠재력에 깊은 관심의 시기

: 중년기는 40세 즈음에 닥쳐와 우울증과 급격한 성격 변화를 나타낸다. 이 시기는 직업에 있어서나 사회적, 가정적으로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며, 추구하던 성과가 나타나 인생을 편안하게 즐기기 시작할 수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절망과 비참, 그리고 무가치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때 중년기의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잃어 공허와 무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융은 에네르기에서 찾고 있다. 40대 이전의 준비 과정에서 충분히 방출되고 투자되던 에네르기가 40대 이후로 에네르기는 여전히 충분하지만 더 이상 소비할 곳이 없는 것이 문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다른 측면에 그것을 재투자해야 한다.

 인생의 후반기는 인생의 전반기에 소홀히 해왔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에 몰두해야 한다. 외향성에서 내향성으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관심에서 종교적ㆍ철학적ㆍ직관적인 관심으로 이동해야하며, 지금까지의 편중성은 성격의 모든 국면의 균등으로 대치되어야만 한다. 중년기의 사람은 청년기의 가치의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사춘기가 비교적 일시적으로 흘러감에 반해 사추기라고도 불리는 중년기는 대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오래 간다. 5년 이상, 10년을 넘기기도 한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를 찾아가는 아주 중요한 인생의 길목이기도 하며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어른들조차 내면에는 폭풍같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 심혜숙 교수님(수녀님이며)에게 중년기 강의를 들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시기를 잘 못 넘기면 괴팍한 늙은이가 된다고. 하지만 반대의 경우 현자가 될 수 있으니 중년기를 잘 넘기라는.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공연을 보는 내내 느껴졌던 것은 '김창현씨, 콘트라베이스랑 사랑을 나누고 있군(make love, 한 마디로 섹스).' 하나의 에피소드를 덧붙이자면 공연이 끝나고 김지석씨랑 서 있다가 김창현씨랑 인사를 나누며 ', 얘가 형 되게 섹시하게 연주했대요'라고 일러 바쳐서 굳이 내가 앞서 생각한 표현대로 직접 양해를 구하고 정정해 주었다. 두 의미는 분명히 다르다. 섹시한 연주를 하는 콘트라베이스 주자들은 많다. 이것은 섹시한 연주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악기와의 섹스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슬픈 중년을 위한 발라드 쯤 왔을 때, 나는 마치 그가 무대 위에 나체로 있는 환영마저 보였다. 야하고 낯 뜨겁게하지만 아주 슬프고 처연하게.

 

물론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악기 뿐만 아니라 타연주자들과 정신적 섹스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 곡이 시작되어 끝나는 동안 어느 기타리스트의 제스쳐와 표정으로 한 텀의 베드씬을 상상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잔향의 무대는 훨씬 원초적이었다. 슬픈 중년의 길목에서 그는 발가벗은 원래의 나, 원초아(id)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왜 모든 야한 글은 슬플까? 글 뿐인가? 영화, 그림, 음악, 모두 그러하다.  로맨틱 코미디, 에로틱 스릴러는 말이 되는데 로맨틱 스릴러나 에로틱 코미디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야할 때 우리는 가장 우리 자신과 가까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옷을 벗는다는 것은 의식을 한 꺼풀 벗는 것과 같다. 태초에 우리는 나체였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 날 때 조차 나뭇잎 몇장이 다였다. 우리가 페르소나를 쓰고 가면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들을 거쳐 옷이건 속옷이건 한꺼풀 벗겨내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본연의 나로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벗는다고 야한 것인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하지만 벗지 않고 야할 때조차 우리가 벗는 것을 상상한다면 이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어째 대부분의 단락이 의문문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어제의 공연은 내게 생각을 던져준 것이다. 영감이 항상 심장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달까?

 

역시 의문문으로 끝이 난다.

 

※ 주: 내용이 약간 센 면이 있고 실명이 직접 거론되므로 미리 김창현씨의 허락을 득하였음을 밝혀 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