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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별헤는 방

사과(2005) - 평범한, 너무도 평범해서 오히려 독특한..


(스포일러가 있지만 스토리가 별로 중요한 영화가 아니고

결말을 알고보나 모르고 보나 비슷하긴 하지만 미리 알려둡니다.

마지막 부분에 스포 있어요~)

 

 

2005년에 제작되었지만 이제서야 개봉한,

허나 언제 개봉했는지도 모르게 쏙 들어가버린 밋밋한 영화다.

 

극장가에서 일찍 들어가버린 영화란 뻔하지 않은가?

대중성 없는, 돈 안되는 영화 ..

 

하지만 밋밋하고 대중성없는, 돈 안되는 영화라 해서

볼 가치가 없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 역시 뻔한 얘기지 않은가?

게다가 대한민국 대표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미가 땡기기엔 충분치 않은가?

 

이선균이 하얀거탑으로 뜨기 시작한게 2007년 초엽이니

연극무대에서 그를 발견하고 캐스팅한 감독은 선견지명이 있는 거겠지?

 

평범남의 대표주자 김태우는 이런 영화 전문인가?

해변의 연인(홍상수 감독)에서의 캐릭터랑 왜 자꾸 오버랩되는 걸까?

 

김태우고 이선균이고 참 변함없는 배우인 것 같다.

4년 전에 찍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모습이랑 하나도 다른 게 없다.

 

그에 반해 독특하고 다소 똘끼충만한 역할도 어김없이 소화해내던 발군의 연기력

문소리에게 이 역할은 외려 너무 평범해서 의외라고나 할까?

 

 

사과는 그런 영화다.

 

밋밋해서 ..

너무나 밋밋해서 오히려 특이하고 감칠맛나는 영화.

 

홍상수 감독 영화처럼 다큐스런 일상을 그리는 플롯을 따라가지만

그의 영화의 캐릭터들이 그렇게 평범하다고 할 수 만은 없다.

캐-_-진상이나 심각한 마초거나 색기를 남발하는 여자들이 하나씩은 등장한다.

 

허나 이 영화는 그런 것마저 없다.

 

현정, 상훈, 민석

주인공들 이름마저도 흔하디 흔해빠진

우리나라 대표 여자 남자 이름이 아닌가?

 

촌빨날리는 문소리의 빠마머리와 김태우의 출근용 캐쥬얼 정장은 또 어떤가?

저예산에 노(no)협찬임에 틀림없다 ㅋㅋ 

 

 

 

 

현정(문소리)과 민석(이선균)은 6년째도 아닌 7년째 연애 중인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다.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집에다간 출장 핑계를 대고 단둘이

주말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밥 잘 먹고 잠 잘 잔 오래된 그 남자가 하는 말 -

 

헤.어.지.잔.다.

 

 

"그럼 오늘은 그만 만나고 내일 만나자. 안녕~"

 

 

아무렇지도 않게 깡총거리며 뛰어 내려가는 현정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돌아본다.

 

 

"나두 내가 이런데 와가지구 이런 말 할지 몰랐는데 ..

지금 말하지 않으면 말 할 자신 없을 거 같다."

 

 

 

 

오래된 공식 커플들이 그렇듯

이별 소문이 온 빌딩에 퍼져 버린 건지

겨우 아픔을 추스르고 있는 현정에게 다가온 이 남자 - 상훈.

 

 

 

공연, 전시회, 술, 드라이브 ..

너무도 뻔해서 나열할 것도 없는 데이트 코스.

 

 

오랜 연애의 종말로 상실감에 빠진 여자와

그 틈을 타고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남자.

 

라디오 사연에나 주로 등장하는 평범한 남녀들처럼 둘은 결혼의 전철을 밟아가고 ..

 

 

리뷰를 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는 단어 "평범함"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만 같은 일상의 소소함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50대의 정정한 나이에 실직하는 가장

평범한 주부인 엄마

티격태격하면서도 친구같은 자매.

 

 

대사들 마저도 맨날 우리가 내뱉는 평범한 말들.

 

장황하고 멋있는 설명으로 이별하지도 않고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감동을 주려는 의도적인 대사도 없다.

 

마치 내 모습같고 우리 엄마 같고 내 동생을 보는 것 같은 화면에 깜놀><하기도 한다.

 

 

그냥 그렇게 타이밍이 맞는 것 같아 결혼했지만

자상하고 성실하고 착한 남편 덕에 결혼의 안정감을 제대로 만끽하는 현정.

 

 

하지만 상훈은 우리 시대 대표 남자, 아버지였으니 ..

마초까진 아닐지언정 혼자서 모든 걸 감내하고 결정하고

힘들면 동굴에 들어가 버리는 이 시대 평범남이었던 것이다.

 

 

평범하기로는 현정도 마찬가지.

결혼의 안정감을 만끽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고 남편에게 애인이고 싶고

내 사랑하는 이와 모든 걸 공유하고픈 그냥 보통 여자일 뿐인 게다.

 

물론 남자 혼자 동굴로 들어가는 걸 끔찍히 싫어하는 ..

 

구미로 내려간 상훈이 타의가 아닌 자의라는 걸 알게 되고

배신감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현정.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민석이 찾아오고 ..

 

사는 건 다 똑같다고 ..

아니 우리나라 결혼한 여자들의 삶이란 다 이런 거라고 ..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결혼한 여자 특유의 외로움,

옛연인에 대한 회한과 약간의 반가움,

그 시절 풋사과처럼 풋풋하고 설익은 미숙했던 감정에 대한 향수.

 

마치 이 장면에서 " 내게 풋사과 같은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건 왜일까?

임신한 현정의 배를 눌러보던 민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었어?"
"아니 뭐 .. 너 만나는 게 유일한 재민데?"

 

 

이제 결혼한 여자 현정에게 민석은 그저 옛추억일 뿐이다.

데이트가 지속될수록 가족과 남편에게 미안한 감정만 쌓여가는 ..

 

세 명의 인물 중 가장 복합적인 캐릭터가 현정인데

(여자라서? 하하 ~ 여자는 복잡한 동물이야 너무.. )

그 복잡다단한 심정을 아마 20대 후반-30대 초중반,

사랑을 해 본 적이 있고 특히 결혼을 경험해 본 여자라면

1
00%씽크로율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밋밋한 배경과 플롯 속에 숨어있는 복합적인 심리.

하지만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던 공감을 살 수 있다는 것.

 

 

 "난 여태껏 사랑이라는 걸 열심히 해 왔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정말루 .. 후우 .. 정말로 노력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애."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이 대사에 함축되어 있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을 관통하는 주제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에서 공감을 느끼기에

내게 이 영화의 주제는 저 대사가 되는 거다.

 

 

그렇게 현정은 이혼을 통보했던 남편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한다.

 

현정이 말미쯤 커피숍에서 민석에게 했던 '미안해'라는 말과

상훈에게 하는 사과(절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분명 다른 거다.

 

여느 여자들처럼 현정도

미안해..라는 말보다는 고마워, 사랑해 ..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겠지.

 

 

 

한편의 영화를 한정된 공간과 짧은 글실력으로 표현하는 건 정말 힘들다.

항상 이 말을 적고 나면 저 말이 하고 싶고 ..

 

이렇게 밋밋한 영화는 너무도 숨은 의미와 해석의 여지가 많기에

항상 마무리하기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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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3 14:16

에 썼던 글인데 강이관 감독.. 춈 기대했던 감독인데..
신작이 영~없네.. 투자를 못 받는 걸까?

검색해보니 최근 국가인권위 관련 옴니버스를 찍은 것 같긴 한데..
나는 여전히 아바타 같은 블럭버스터 대작들에선 큰 감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감독님, 신작 한 편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