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문/사색의 방

남도방랑기(5) -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당신, 분노할 곳에 분노하지 못할 테면 잠자코 가만히 있기나 해!"
 
3시간쯤 열심히 떠들었을까?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향해가고 있다. 안주를 집어올리지도 않은 채 깨작거리던 나의 젓가락은 마침내 테이블 위에 조용히 놓여졌다. 그리고 고개를 그리 많이 처 들지도 않은 채 눈을 치켜뜨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흠칫했는지 자리를 옮기자고 한다. 거기다 대고 눈치도 없이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그렇게 자본의 노예로 살아."

그날, 나와 함께 그를 대면한 H는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잡지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남자라고. 그랬다. 오랜 유학생활 끝에 우리나라 최고 그룹사의 금융 요직에서 근무 중인 성공한 남자, 인텔리(?)의 교본같은 모습이었다. 한벌 정장 아닌 콤비를 저토록 센스있게 소화하기란 참으로 어려운데다 양복 윗주머니의 포켓에 꽂힌 은색의 실크 손수건은 교과서적 말쑥함에 세련됨을 가미해 주었다. 물론 큰 키와 적당한 덩치없이는 모든 것이 수포였겠지만.

그나저나 노래방이라니. '연예인이세요?'라는 뻐꾸기 만큼이나 식상하기 그지 없다. 그가 몸담의 그룹사의 비판으로 시작한 나의 신랄함은 미국과 자본주의, 언론에까지 이어졌고 고작 두번째 만난 여자에게 귀찮고 재수없는 비판만 받고 있느니 열심히 뻐꾸기를 날려 몸이라도 탐하는 게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그에게는 훨씬 이득이리라.

내가 너와 한번 키스했다고 두번 하란 법도, 그 이상을 내어주란 법도 없다. 검증되지 않은 음식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이라도 봐야지. 보기 좋다고 덥썩 살 필요도, 여우의 신포도처럼 그냥 지나칠 필요도 없잖은가. 하지만 너는 그토록 맛이 없었다. 너로서는 나란 여자를 한번쯤 가져보고 싶었겠지만 너의 자리는 너의 세련됨에 무릎꿇을 여자 옆에서 찾았으면 한다. 가지고 싶어하는 상대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은 나를 거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 상대가 돈주고 성을 사는 매춘업소에 온 남자냐, 너에 대한 사랑(이라 쓰고 미끼라 읽지)을 빌미로 착취하려는 더 약아빠진 남자냐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로 한 번 키스했다고 그에게 책임을 요구하란 법도 없다. 이상하게 한국 여자들은 육체적 스킨십 한 번에 모든 걸 남자에게 요구한다. 그 순간, 자기의 선택이란 없었단 말인가? 당신이 한 번 안겨줬다하여 그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혹은 앞으로의 연애를 그대에게 저당잡혀야 하는가? 그토록 근거없는 요구의 주장과 내멋대로 되지 않는 타인에의 원망은 어디서 부터 오는가?

여자들이여, 너는 그를 거절할 권리가 있고 대접받을 의무가 있다. 권리를 찾지 못하고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건 다 너의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스스로의 중심도 지키지 못는 자가 어찌 남을 변화시키고 선동하느냔 말이지.
 
그는 영원히 나를 이렇게 기억하겠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나의 면모들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아쉬움이야 있겠는가? 그는 또 그렇게 그의 자본적 매력에 빠져들 화려함 속 껍데기들을 찾아나서면 될 일인 것을. '피부 한 꺼풀만 벗겨내면 다 똑같다'며 냉소적으로 내뱉던 피부과 의사 친구 녀석도 예쁜 여자 앞에서는 오줌을 지렸더랬지. 그래서 언젠가는 성인용 기저귀를 생일 선물로 던져버렸다.
 
청산도의 밤은 모든 분노를 앗아가 버렸다. 그곳에 남은 건 느림과 여유 뿐이었다. 시간이 갑자기 늘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1분은 마치 100초처럼 흘러갔고 아인슈타인과 융이 아니더라도 나는 마치 시간의 흐름 안에 부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평소에 주장하던 시간의 뒤엉킴은 지금의 착각처럼 느껴지는 현실과 아주 맞아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니까.

배가 드나드는 마을의 중심지 도청항 주변은 그래도 가로등이 있어 고즈넉한 밤바다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기에 두려움을 덜어내고 운치를 더해 주었다. 도시라면 아직 9시가 안 된 초저녁처럼 이른 시간이지만 여기선 새벽 2시쯤 된 것 같은 이상한 밤기운 마저 감돌았다. 항구 앞 자그마한 광장에는 동네 아주머니들 너댓과 청년들 서넛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그렇게 여름밤을 스쳐가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좋아 이어폰을 끼고 싶진 않았다. BGM이 깔리듯 낮은 소리로 스피커를 켠채 조용히 앉아 소금기 어린 바다내음을 차곡차곡 콧 속에 담아낸다. 마침 페트루치아니의 September Second가 흐른다. 선천성 불구였던 그의 삶의 열정에 한여름 밤의 가을 초입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렇게 남도의 두번째 밤이 지난다.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흥미진진했던가? 나는 또 얼마나 다른 것들을 마음에 담아냈던가? 청산도의 오후는 얼마나 느렸던가? 그 안에서 나는 함께 여유를 즐겼나? 아니면 다음 날 아침에 볼 여행자처럼 종종거리며 짜증을 냈던가? 내게는 그런 쫓김이 없었던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할 수 있어서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듯 보이던 그녀는 얼마나 조급해 했던가? 청산도의 마을 교통 안내를 확실히 해 놓지 않았다며 안내 데스크에 계시던 맘씨 좋은 아주머니께 불평하는 그녀에게 조금 화가 났었다. 덕분에 더 자세하게 그 분이 설명해 주시지 않았던가? 팸플릿에 나오지 않은 버스편까지 하나하나 쉽게 알려주시지 않던가? 볼펜으로 숫자 몇개 받아 적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나? 아, 요즘 다들 키보드를 써서 그런가? 사람들은 이상한 곳에 화내고 있다.

청산도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내겐 보여줄 사진이 딱 한 장 있다. 느즈막히 항구에 도착해 아침에 들었던 정보대로 지리 해수욕장으로 발길을 틀었던 내게 그 마을은 6-70년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하루에 5대 밖에 다니지 않는, 그나마 6시면 마지막 버스가 지나는 마을 어귀의 버스 정류장 턱에 걸터 앉아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는 마을길 한켠으로 1.5톤 트럭한대가 털털거리며 들어오고 길가에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삼삼오오 아낙들은 느릿느릿 엉덩이를 떼고 트럭쪽으로 모인다. 검정 고무장화를 신은 운전석의 늘그막한 아저씨가 내려 깊어 보이는 고무통을 짐칸에서 내리고 깊숩이 손을 뻗어 무언가를 건져 올린다.

아아, 그것은 생선이었다. 청산도의 바다내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태양을 푸른 빛으로 담아낸 아직 살아 퍼덕거리는 생선들.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내 팔뚝만한 크기의 생선 두마리와 붉은 비늘이 돋보이는, 하지만 시중에서 보던 도미라기엔 크기가 비교적 커보이던 도미로 밖에 추정할 수 없는 세 마리의 생선이 노끈에 아가미와 주둥이를 타고 연결된 하나의 생선 꾸러미 였다. 아직 살아 꿈틀대던 생선 다섯 마리가 그렇게 하나의 노끈을 타고 아낙에게 들려졌다. 허리가 약간 굽어버린 시모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한 번 맡더니 생선꾸러미 움켜 든 며느리를 앞장 세워 걷는다.

"어머이~ 오늘은 함 지져 볼랑가요?"
"기름 살짝 두르고 굵은 소금 슬슬 뿌려 구운 게 맛있드라야." 
"기름이 있을랑가 모르겄네유."
"들기름 좀 넣어도 안 되겄냐, 아야?"

나는 그 풍경이 너무도 살가워 한참을 처다보다 급히 카메라를 꺼내어 뒷모습을 담아본다. 너무도 멀어져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장면을 붙잡고 청산도의 사진을 찍었다며 그래도 뿌듯해 한다. 나머지 아낙들도 각자 필요한 생선들을 두어마리씩 꿰어 쥐고는 자연식이 대부분일 밥상들을 차리러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버스는 정류장에 서지도 않고 지나간다.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다시 4킬로를 걸어 돌아간다는 게 이미 땡볕 아래 지쳐버린 내게는 힘겨운 각오였다. 게다가 여긴 가게도 없어 물 한통 사 마실 수가 없단 말이다. 슈퍼마켓이라곤 도청 근처에 농협 하나로마트와 도시의 아파트 상가 정도 크기의 마트 하나가 전부다. 벌떡 일어나 쫓아가던 버스의 뒤꼭지를 바라보며 터덜터덜 돌아와 다시 정류소 입구에 걸터앉아 여러가지 방법을 고민해 본다.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의 막차 시간은 조금 더 남았으니 그걸 타고 최대한 가서 그 근처의 숙소를 알아볼까? 아, 그렇다고 거긴들 뾰족한 수 있을까? 어차피 슈퍼랑 식당 없긴 매한가지 일텐데.  

점점 산 아래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망연자실한 내 앞에 SUV한대가 멈춰선다. 머리가 살짝 벗겨진 할아버지는 도청으로 갈 거면 얼른 타라신다. 버스정류소에 40분을 앉아 있던 보람이 이렇게 찾아 오는가? 역시나 사람만이 희망이다. 공짜로 차를 얻어탄 사람의 최고 미덕은 조수석에 앉아 재잘거려 주는 것이다. 물론 예의바르고 건강하고 건전하게. 차로 5분 남짓의 거리를 걸었다면 내가 앉아 기다린 만큼의 시간이 다시 길 위에 흩뿌려졌을 게다. 

이 느린 마을의 불편(이라 쓰고 조금 절차롭게 하기라 생각하자)한 점이 하나 더 있다면 문 연 식당 찾기가 또 그렇게 힘들더란 것이다. 버젓이 개업해 놓고도 잠긴 가게가 수두룩 하고 문이 열려 있는데도 오늘 점심/저녁 식사는 안 된다며 거절당하기 십상. 나는 또 이런 고객주변주의 상업문화가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진짜 웃음을 저당잡힌 도시의 감정노동자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겨우 전복 주문 택배 뿐 아니라 식당에 앉아 바로 먹을 수도 있는 집을 3군데를 들르고야 겨우 찾아 마른 목을 축이러 맥주부터 주문한다. 그리고 시가에 따라 1kg당 4-6만원이라는 전복을 반절만 달라 주문하곤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쟁반에 찬과 맥주를 들고 온 종업원이 두리번 거리더니 옆테이블 분과 일행 아니냐고 한다. 혼자 왔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테이블 세팅을 해주고 맥주를 내려 놓는다. 그리고는 맞은 편 테이블의 젊은 커플과 번갈아가며 처다보더니 퇴장한다. 

그대들에게 고하노니, 
혼자를 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길 바란다. 
특히 여자 혼자.


※ 필자 주: 이 글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는 빌어먹을 SNS상 친구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인생에 한번쯤 등장하였으니 나에게는 각색할 권리가 있다. 물론 그에게도 읽고 항의할 권리는 있겠지만 나는 그가 그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없는 남자란 걸 이미 꿰뚫었으니 배를 째겠어.